백성에게는 성군이었지만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
조선시대 왕중에서도 손꼽히는 성군이었던 영조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임금입니다. 무려 52년간 왕위에 있었던 영조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고, 탕평책과 균역법 등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치적은 아들인 사도세자와의 갈등으로 인해 빛이 바랬고, 결국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과연 영조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영조는 왜 그렇게 많은 자식을 낳았을까요?
사실 이 부분은 논란이 많습니다. 실제로 영조는 무수리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며, 형제도 1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후궁 소생 자녀 중엔 경종 독살설 의혹을 받는 연잉군(훗날 영조)도 있었습니다. 즉, 혈통 자체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후계자를 많이 생산해야 했습니다. 또한 당시 왕실에서는 왕자녀 출산이 곧 권력 승계와도 직결되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사도세자는 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을까요?
당시 노론 세력은 소론 강경파였던 세자 이선을 제거하고자 했고, 이로 인해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 이선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와중 1762년 윤5월 13일, 세자는 부왕 숙종의 명이라며 창덕궁 후원 존덕정 앞뜰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였습니다. 이때 숙종이 직접 참관했는데, 이후 신하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오늘 과녁을 맞힌 사람은 누구냐”라고 물었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그러자 좌의정 홍봉한이 나서서 “신이 맞추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승정원일기에는 ‘홍봉한이 아뢰기를 ’밤 이경 무렵에 신이 나아가 보니 상이 바야흐로 취하여 정신이 어지러워 실수하였으니 매우 놀랍고 황공합니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세자는 잠을 자고 있던 도중 갑자기 들이닥친 금부도사 일행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임오화변입니다.
영조는 왜 그토록 손자 정조를 아꼈을까요?
손자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개혁 군주였습니다. 특히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고 인재 육성에 힘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창설했으며, 수원 화성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정조는 기존의 붕당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바로 탕평책입니다. 따라서 훗날 순조 때 이르러서는 안동 김씨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면서 마침내 정국 주도권이 남인 계열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