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더불어 최고의 성군으로 손꼽히는 인물 세조

조선시대 왕 중에서도 세종대왕과 더불어 최고의 성군으로 손꼽히는 인물인 세조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임금이기도 하죠. 수양대군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왕좌에 올랐는데요. 이후 수많은 업적을 남긴 것과는 별개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군주이기도 합니다.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세조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단종 복위 운동(사육신), 계유정난, 한명회 등이 떠오르네요. 사육신은 말 그대로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은 신하들을 일컫는 말이고, 계유정난은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김종서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죠. 한명회는 이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고요.

계유정난이란 무엇인가요?

문종이 죽자 어린 단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그러자 당시 좌의정이었던 김종서가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병조판서 민신 그리고 안평대군 이용 및 금성대군 유와의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죽임을 당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이때 실권을 잡은 세력이 바로 공신세력이었죠.

공신세력이라 함은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김종서 사후 정권을 잡은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 같은 대신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조정의 인사권을 쥐고 흔들면서 각종 부정부패를 일삼았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이시애의 난 때 함경도 지방 군 지휘관이었던 강순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히려 진압해야 될 군대를 빼돌려 중앙권력을 강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시애의 난은 무엇인가요?

1467년 5월 초순경 지금의 강원도 북부지방인 북청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사건입니다. 본래 평안도 출신이던 이시애는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높은 벼슬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1466년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공민왕 때 원나라로부터 빼앗은 철령 이북 땅을 명나라에 반납하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고려조정에서는 이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장군을 축출하면서 요동정벌 계획 자체가 무산되었고, 따라서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주장했죠. 결국 분노한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고, 당황한 조정대신들은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장수가 나타나 순식간에 반란군을 제압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바로 훗날 권좌에 오르는 세조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조는 굳이 쿠데타를 일으켰을까요?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 번째로는 앞서 언급했듯이 북방지역의 불안감 해소였는데요. 실제로 홍건적 침입 이후 북쪽 국경지대에선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고, 특히 1368년엔 나하추의 공격으로 개경이 함락되기도 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누군가가 나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또한 정통성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데요. 아버지였던 태조 이성계와는 달리 형제도 없고, 아들도 없었던 세조로서는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새로운 리더가 필요했다고 보입니다.

쿠데타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데, 그렇다면 세조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나요?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연산군처럼 폭군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최근에는 드라마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다만 분명한 점은 국가체제 정비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겁니다. 우선 경국대전 편찬을 지시했고, 호패법을 실시했으며 직전법을 시행함으로써 관료제 기반을 마련했어요. 게다가 국방강화를 위해 진관체제를 도입해서 전국 각 지역마다 방어체계를 구축하도록 했고, 관수관급제를 실시해서 국가재정을 안정시키기도 했죠. 물론 지나치게 공신 중심의 정치를 펼쳤다는 비판도 받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민생안정과 국력신장에 기여했으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고 봅니다. 오늘은 조선 제7대 국왕이자 한국사 최초의 반정으로 즉위한 세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아무래도 현대사회 관점에서 봤을 땐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적어도 훌륭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자질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