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임금 선조
조선시대 왕 중에서도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인 '선조' 하지만 그런 선조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임진왜란 때 도망간 것입니다. 이 사건 하나로 인해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왕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선조이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에게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선조는 어디로 갔나요?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군은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이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우선 첫째로는 조정 대신들의 책임회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하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파벌싸움에만 몰두하였고 결국 아무런 대책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무능한 군주였던 선조의 탓이기도 합니다. 당쟁과 권력다툼 속에서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했고 위기상황 대처능력 또한 부족했습니다. 셋째로는 신립장군의 패배 등 군사전략 실패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민심이반 현상이었습니다.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서 백성들은 지쳐있었고 의병활동 역시 크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란 이후 선조는 어떻게 되었나요?
1593년 1월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다시 영의정 이산해를 비롯한 서인세력을 몰아내고 동인 세력을 등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서인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급기야 1608년 2월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사실상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후손이자 인순왕후의 양자였던 정원군(원종)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며 이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세력은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하며 후금으로부터 침략 위협을 받게 되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누구인가요?
1608년 즉위하자마자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며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국가재정을 확충하는데 힘썼습니다. 특히 토지대장 소실로 인한 세금부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패법을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외교적으로는 중립외교 정책을 펼쳐 명의 원병 요청을 거절했으며 강홍립 장군을 파견하여 청태종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면서 실리를 추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대외정책 덕분에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민생안정을 위한 개혁정치를 펼치면서 폐모살제라는 무리수를 두면서 지지층이었던 북인마저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반정공신이던 이이첨 등 대북파로부터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