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이자 폭군이었던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은 조선시대 왕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군입니다. 아버지 이성계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었지만 결국엔 왕위에 올랐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임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태종이 마냥 좋은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심지어 가족인 동생과 처남까지도 죽였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지만, 최악의 폭군이었던 아이러니한 인물이죠.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태종 이방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어떤 인물인가요?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5번째 아들이자 2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의 소생입니다.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와의 사이에선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등 총 6명의 아들이 있었고,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와의 사이에선 방번, 방석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 셋째 아들인 방간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형들인 방우와 방과는 모두 죽고, 넷째 아들인 방석이 세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후 계모인 신덕왕후 강 씨의 죽음 후 실권을 잡은 다섯째 형 방원과의 갈등 끝에 1398년 8월 26일 막냇동생인 방석과 방번 형제마저 죽이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1400년 11월 29일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의 3번째 왕이 됩니다.

태종 이방원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나요?

왕위에 오른 직후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사병혁파였습니다. 당시 고려 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각 지방마다 군사들이 많이 존재했는데, 이를 국가 소속으로 전환시켰습니다. 또한 양민 출신 노비였던 장영실을 등용시켜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신문고 설치, 호패법 실시, 주자소 설치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공신 세력 및 반대세력 제거라는 목적 하에 무자비한 숙청 작업을 진행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원경왕후 민 씨의 친척이며 개국공신이었던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사했고, 역시 같은 공신중 한 명이었던 조사의 사건을 계기로 친형제인 방간과 박포를 처형했으며, 장인 심온마저 역모로 몰아 유배시킨 후 사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인 원경왕후 민 씨와도 불화가 생겨 그녀마저도 폐비시키고 말았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어떻게 해서 훌륭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나요?

사실 태종 이방원은 처음부터 뛰어난 군주감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하들 앞에서 위축되고 소심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죠. 그랬던 그가 집권 초기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사람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지냈던 스승 원천석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정몽주 암살사건 이후 충격을 받은 이방원에게 “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자”라고 꾸짖으며 정신 차릴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충녕대군(훗날 세종)의 존재 덕분이었습니다. 실제로 즉위 초까지만 해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냥에만 몰두하던 태종이 1418년 드디어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국정운영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충녕대군의 탄생이었죠. 마지막으로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처가 식구들의 활약 덕이었습니다. 비록 왕비자리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태종의 옆을 지켰던 원경왕후 민 씨나, 어린 시절부터 늘 곁에서 보필하면서 신뢰를 쌓아왔던 하륜, 조영무 등이 있었기에 비로소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분명 태종 이방원에게도 배울 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나치게 잔인했다는 비판을 피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부분만큼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겠죠. 이상으로 태종 이방원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